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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는 대한민국의 법조인이자 정치인으로, 모래시계 검사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4선 국회의원과 이명박 정부 시절 한나라당 대표를 거치고, 박근혜 정부 시절에는 제35, 36대 경남지사를 지냈습니다. 대선 출마를 위해서 36대 때 도지사 직을 중도 사퇴한 이후 대선에 출마하였고, 이후 자유한국당의 초대 대표를 역임했습니다. 같은 당의 대표를 각각 이명박정부 시절 여당일 때 한 번, 문재인정부 시절 야당일 때 한 번 지낸 것입니다.[9] 종합적으로 볼 때 현존 보수계 정치인 중 커리어가 가장 좋은 사람 중 하나다. 굵직한 것만 봐도 서울시내 4선 의원 + 원내대표 + 재선 도지사 + 제1보수당의 대선 후보 + 당 대표 2회다. 경남 창녕군 출신에 경남도지사까지 역임했지만 정치적으로 PK보다는 TK 계열로 구분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자신도 스스로 TK의 성골은 아니라도 진골은 됩니다고 주장했습니다. 경남 출신이지만 중/고등학교를 당시 경북이었던 대구시에선 다니며 성향과 인맥이 형성된 전두환[경남 합천군]과 유사한 케이스인데요.



1954년 12월 5일 경남 창녕군에선 2남 3녀 중 넷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때 이름은 홍판표. 그의 아버지는 무학에다 소작농으로 경제적으로 무능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는 문맹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고리 사채꾼에겐 머리채를 잡혀 곤욕을 치른 적도 있습니다고 합니다.


성함

홍준표[洪準杓]

개명전본명

홍판표[洪判杓]

출생일

1954125[64]

출생지

대한민국 경남 창녕군 남지면

출신가문

남양홍씨 당홍계

,몸무게,혈액형

167cm-62kg- A

본가가족관계

결혼유무,(배우자정보) 이순삼-슬하2

최종출신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학사

병역

육군 이등병 소집해제[방위]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창녕군과 합천군, 대구시 등지를 전전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6군데나 전학을 다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친구를 사귈 수 없어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고.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하였고 초등학교에선도 1등을 차지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 영양 부실로 인해 성인이 되어서도 몸이 야위었고, 초등학교 졸업 당시 키가 124cm에 불과할 정도로 왜소했습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지만 도시에선 공부해 보겠다고 부모님을 설득해, 고향에 있는 중학교가 아닌 대구시 영남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숙식은 대구 직물 공장에 취직한 누님 방에 얹혀 살며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억수 같은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아버지와 8km를 걸어 대구행 버스를 탔는데, 무거운 지게를 진 아버지 뒤에선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여 절대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고 합니다. 대구 대명동 사글세방에선 누님들이 싸주는 꽁보리밥 도시락을 먹고 공부했습니다. 그나마 도시락도 없이 혼자 운동장에선 수돗물로 배를 채울 때도 많았습니다.


홍준표 하나 때문에 온 가족이 결국 대구광또한로 이사왔습니다. 비가 오면 물이 새는 셋방 단칸에 온 가족이 같이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사과 행상을,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에도 하루 4~5시간만 자고 공부해 영남중학교[대구]에선도 1등은 그의 차지였지만 명문 경북고등학교가 아닌 영남고등학교로 진학했습니다. 경북고는 장학금을 지급하지 않아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경북의 1류 명문이고 전국에선도 알아주는 경북고등학교



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자신에겐 컴플렉스였고, 출세에도 핸디캡이 됬습니다. 게다가는 대학 첫 소개팅 자리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이 나왔는데 그녀가 집이 어디냐, 대구다, 그럼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냐, 영남고다 그랬더니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고. 이때 받은 상흔으로 이후로 미팅 종류를 다시는 하지 않았습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밑에 첨부된 그의 대학 시절 사진만 보더라도, 그의 지인들은 당시 홍준표 하면 그가 늘 신던 검정 고무신을 떠올리곤 합니다. 소개팅녀의 행동이 혹시나 영남고 때문이 아니라 그의 패션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그는 출신고를 묻는 그녀에겐 순간적으로 심각한 부담을 느꼈던 것만은 사실인 거 같습니다. 그의 출신 고교에 대한 컴플렉스는 검찰 생활에까지 이어졌는데, 비평준화 시절 명문고등학교 출신들이 즐비한 검찰 조직 내에선도 멸시를 받았습니다고 합니다. 명문고 출신 동문들끼리 밀어주는 문화가 만연한 상황에선 비주류의 설움을 느껴야만 하였고, 원래 잘나가는 집안도 아니었고 찢어지게 가난한 흙수저 출신인 것까지 더해서 검찰 내에선도 그야말로 개무시당했습니다고 합니다.


그는 커리어에선 평생 아웃사이더 또는 비주류를 자처하였는데, 그 요인으로 출신고등학교에 대한 열등감, 자신의 가난했던 집안 배경 등으로 인한 콤플렉스를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원래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원래 고등학교때 이과생이었습니다고 합니다. 경북대가 국립대라서 학비가 저렴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마저도 진학할 형편이 못되어, 아버지가 일체의 학비와 생활비가 들지 않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라고 해서 육사에 들어가 장교가 되고자 했습니다. 육군사관학교는 국가에선 모든 부담을 했기 때문에 사관학교 특성상 학비가 안 든다는 점도 주요한 고려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구광또한 토박이가 아닌 아버지가 시장통에선 무시당하는 것도 모자라 억울한 누명을 쓰고 말도 못 하는 모습을 보고 힘없는 이들을 돕는 검사[법조인]가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에 1972년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습니다. 참고로 그는 영남고등학교 역사상 첫의 고려대학교 합격생이었습니다고 합니다.


대학 시절 때는 공부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병행했습니다. 5층 여관집에 출퇴근 가정교사를 하면서 1살 많은 제자의 유혹을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고 합니다. 고연전 축제조차 딱 한 번 갈 정도로 바빴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1973년 동아일보 광고 사태 때 선후배들과 중지를 모아 동아일보 격려 광고를 처음 낼 만큼 정의감이 강했었습니다. 때문에 중앙정보부 요원으로부터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고. 대학은 어떻게든 졸업해야 합니다는 생각에 더이상 시국 행동은 못했습니다. 강희락 경찰청장, 주상용 서울경찰청장, 이승재 해양경찰청장, 김성곤[1952] 의원, 박계동 국회 사무총장, 송하진 전북도지사 등이 고려대학교 동기입니다.


그의 진학 후 더 이상 대구광역시 또한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데다, 뒷집에 불이 났는데 가족들 집까지 다 타서 가족들은 때마침 부친이 현대조선소의 경비원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갔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내려온 어느 겨울 밤, 일당 800원짜리 경비원 아버지가 목욕탕에나 봄직한 플라스틱 샤워의자에 앉아 칼바람 부는 바닷가 모래밭에 불을 쬐고 있던 모습을 봤는데, 그때 "불공평한 세상 한 번 바꿔보자"고 또다시 결심했습니다. 대학교 2학년 당시 부친이 추운 모래밭에선 근무하니 회사에선 술이라도 먹고 버티라고 막소주를 줬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친은 10개월 만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사법시험 도전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72학번인 그가 6년이나 병역도 미루고 졸업도 미뤄가면서 고시 생활을 이어가던 중[1차는 붙은 상태였습니다], 고려대학교 부근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에선 일하던 여자 은행원 이순삼에겐 반했습니다. '전전반측 잠을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고 당시를 기억한 바 있습니다. 숫기는 물론 땡전 한푼 또한 없었지만, 같은 은행에 다니는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데이트를 하고선 "나는 아가씨가 마음에 듭니다. 나와 앞으로 살 생각이 있으면, 다음 주 수요일까지 도서관 4층으로 찾아와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월요일 저녁에 그 여인은 정말로 도서관으로 찾아왔고 홍준표는 첫 만남의 자리에선 불문곡직하고 "형편이 되는 대로 같이 살자"는 말로 프로포즈를 했습니다.



전북 군산시에 살고 있는 장인, 장모될 분들을 만나러 둘이 내려가서는 인사를 드렸는데, 홍준표가 마음에 안 들었던 장인은 뒤에선 딸에겐 "그거 구름잡는 놈! 택도 아닌 놈! 그런 놈이 고시 되면 내 손에 장을 지져!"라고 했습니다고. 장모는 "사람 착해 보이니 잘 해봐라" 그랬다며, "어떠셨데?" 하고 묻는 그에겐 이순삼이 솔직히 털어놨단다. 그 덕에 "장모는 혹 용돈을 드려도, 장인어른은 용돈은커녕 26년간 내 집에 발도 못 붙이게 했습니다"고 훗날 2017년 자유한국당 후보 군산 유세에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정말 얼마 안 가 홍준표는 그녀와 같이 살기 시작했습니다. 신접 살림은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 7동 지하 단칸 셋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사법시험에는 계속 떨어졌고, 결국 군대에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몸무게가 48kg으로 워낙 말랐기 때문에 방위로 근무하게 됐는데, 사법시험에 붙지 못해 고향에 가기 창피했던 그는 처가가 있던 전북 부안군의 해안초소에선 복무하였습니다.



그렇게 단기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사법시험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5년에 걸친 헌신적인 뒷바라지 끝에 29살인 1982년, 드디어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