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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요 영화를 보기 전에 요 영화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가족희비극’이었습니다, 희비극이 무슨 뜻인지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은 희극과 비극 둘 뿐이었고, 그러한 고정관념 때문이었을 것이다, 구글에 검색하면 장르명이 ‘다크 코미디’로 나온다, 결국 코미디, 희극(喜劇)이라는 이야기인데, 제가 보기에는 다크 코미디의 반대로 써니 트레지디(Sunny tragedy: 화이트 비극)라는 용어도 있어야 할 듯싶다, 요 영화가 써니 트레지디라는 말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를 듯하다고 얘기하고 싶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하나의 작품에 불과할 것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자서전이라고 생각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희극이고, 누군가에게는 비극, 아니 자신의 인생이기 때문에 단정짓지 못한다는 말이다, 저는 위기 국면을 지나 절정과 결말에 다다랐을 때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에도 ‘기택’은 유머러스하게 말을 했다, 그러니까 희극적인 전개는 꾸준했다, 하지만 초반과는 달리 후반에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 얘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관객들은 웃는 관객들도 있었다, 어쨌든 희비극이란, 겉으로는 희극이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비극, 찰리 채플린의 명언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영화인 것이다,

요 영화의 줄거리는 한 가족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표면적 중심은 다른 가족이다, 



‘기택(주인공)’ 씨 가족은 반지하에서 살아가는 ‘전원 백수(소개글에 이런 말이 나와 있어 빌린다)’이다, 그들은 ‘피자나라’의 피자 포장 상자를 조립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그러다 ‘기우(기택 씨의 아들)’ 친구가 ‘기우’에게 자신이 유학 가 있을 동안 대신 과외를 맡아달라 부탁한다, 그 집이 요 영화의 표면적 중심이자 ‘기생’되는 부잣집 가족이다, 이 가족은 아버지가 회사 총수로 가정주부와 운전기사가 딸린 매우 부잣집이다, 참고로 집은 유명 건축가가 짓고 살았던 집으로 나중에 그들이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아제가 매우 순진해서(영화 내 기우 친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심플’하여서) ‘기우’를 시작으로 ‘기택’ 씨 가족 전체가 그 부잣집에서 각각 운전기사, 가정주부, 과외 선생님 둘로 취직한다, 요기서 쉽게 영화 제목 ‘기생충’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그냥 희극이다, 사실 반지하에서의 비참한 삶이나 그런 것들이 비극적이긴 하지만 그들의 유쾌한 익살에 가려져 드러나지 않습니다, 요기서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게, 결국 이 익살이라는 것도 또한 우울증과 같은 기생충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울증이이 죽음으로 인도하는 기생충이라면, 익살은 삶으로 인도하는 기생충인 것이다, 만약 익살이 없었다면 그들은(또 필자는) 자신들의 분수를 알고 진작 죽었을 것이다, 아니, 기택 씨가 먼저 죽었더라도 이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익살이라는 잔인하게 유쾌한 기생충 때문에(특히 가장인 기택 씨의 그것 때문에) 징그럽게 끈질기게 살아내버린 것이고, 그로 말미암은 비극적 절정의 폭발이 죄없는 그 부잣집에서 터져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안다, 잘 필터링 해서 해석해주길 바란다,





그들에게서는 살아오면서 습득하고 체득한 기생충의 능력이 보인다, 바로 사기를 잘 치는 것이다, 말을 청산유수로 하고, 사기를 칠 때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준비한다, 연기도 잘한다(이 연기를 연습할 때 배우들이라고 생각하니까 재밌었다,), 그들은 그러한 사기로 인해서 잘려나간 부잣집의 운전기사와 가정주부(그 가족들이 그들의 자리를 꾀찬 것이다,)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기정’ 씨 빼고 말이다, ‘기정’ 씨는 그러한 점으로 어쩌면 죽음이 ‘기정’사실화됐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기정’ 씨도 사기에 일조했지만 그들과 다르게 계획을 찾았고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 특히 기택은 계획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예 ‘무계획(No plan)’을 계획이라고 괴변(혹은 그의 인생 철학)을 늘어놓았다, 이러한 면모는 그녀의 오빠인 ‘기우’가 그 부잣집에서 가족들 전부와 잠시 지낼 때 기정에게 했던 말이 증명한다, ‘너는 우리랑 다르다고, 거품목욕을 하며 티비를 봤을 때, 마치 이 집에 원래 산 것처럼 너무 어울렸다고, ‘ 어쩌면 그녀는 가난하지 않았더라면 크게 될 인물일는지도 모른다, ‘기정’은 가난으로 잊혀버린 수많은 인물들을 상징하는 인물일지 모른다,



만약 이렇게 그대로 진행된다면 아마 희극적 혹은 해학적으로 끝나버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그러질 않았습니다, ‘기우’ 말마따나 매우 ‘상징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해고당한 가정주부의 남편이다, 그는 사실 그 부잣집 지하에서 살고 있는 진짜 ‘기생충’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줄거리는 이런 식이다, 위기와 절정, 결말에서 기생충끼리 싸우고 하면서 갈등이 극고조되고 하는 그런 이야기이다, 굳이 줄거리는 많이 쓸 필요가 없을 듯하다,

제가 이 글을 쓰려는 데 동기가 된 아이디어를 이제 쓸 것이다, 바로 상호텍스트적 관점에서 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다, 먼저 들고 싶은 작품은 ‘솔 벨로’ 작가의 ‘오늘을 잡아라’이다, 근데 까먹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그 감상을 쓰지 않고 지낸 몇 시간 만에 까먹었다, 충격을 먹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어서 글 쓸 뭐 그런 것도 안 생겼었다, 뭐, 그 소설에서 아들 ‘윌헬름’이 아버지에게 기생하고 뭐 그런 식상한 말을 쓰려던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굳이 비슷하게 쓰자면, 윌헬름의 그 비극적인 권태롭고 뭐 그런, 젊은 날 허송세월을 보낸 답답한 중년 인생이 내 미래 같았고, 마찬가지로 이 ‘기생충’ 가족이 내 미래와 같았다, 이런 얘기와 가까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듯하다, 오늘을 잡아라도 꽤나 희극적인데,




두 번째 작품은 최수철 작가의 ‘얼음의 도가니’이다, 아, 이건 기억납니다, 얼음의 도가니에서 ‘진평’이라는 곳은 주인공에게 ‘이상한 나라’ 취급을 받고 주인공 ‘임휘경’은 그곳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뭐 거기서 만난 독일 여성과도 잘 이어지지 않는데, 이것이 생각난 이유는 요 영화 마지막에 그 부잣집의 집이 독일에서 온 가족들에게 팔렸기 때문이다, 독일이 좀 이국적인, 완전히 다른 나라라는 상징적 이미지가 있나… 상징이라는 말은 잘 잡히지 않는 개념이다, 어쨌든 기생충 가족 역시 자기 주변의 세계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물론 기생충으로서 잘 적응하지만) 하는 것이 ‘임휘경’과 닮았다는 점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상호텍스트적 감상을 왜 하는 것이냐 하면, 글쎄, 좀 효과적이지 않나?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더욱 의미역을 넓힐 수 있고 말이지,

이제 내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요 영화를 보고 충격을 먹었다, 아니 충격보다는 다시 한 번 자살을 해야겠습니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안 했으니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겠지, 저는 기생충이라고 자주 생각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생충이라는 단어를 쓴 건 아니고 남한테 민폐만 끼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죽고 싶었으나, 저는 생물이라, 살고자 했다, 근데 이 기생충처럼 나도 누군가의 인생을 망칠까봐 겁이 저는 것이다, 



또한 나도 그들처럼 무능력한 것이다, 열심히 사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고 쉬운 일이, 적어도 내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보이지 않는 덧글에 반박해본다, 그것도 그렇고, 그 가족들의 모습에서 내 가족의 모습을 봤다, 우리 가족, 아버지는 자주 자신을 선장에 빗대며, 자기가 아니었음 우리 가족은 길바닥에 나앉았다고 열변을 토하시곤 하셨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의 편에 자주 섰기 때문이다. 무튼...말이 길어지니 여기서 글을 마치면서

이 영화에 쿠키 엔딩크레딧 존재에 대해 궁금해하실 분들을 위해 글을 남겨본다면,

엔딩 크레딧 쿠키는 따로 존재하질 않았습니다.